• HOME >
  • 말씀과 묵상 >
  • 함께 읽는 글
불꽃같은 거룩함, 용서하는 사랑
아내와 나는 33년 동안, 리처드 포스터가 적절하게 표현한 대로 "황홀함과 악취가 뒤섞인" 삶을 살아왔다. 아내와 함께해 온 시간은 대부분 즐거웠다. 그러나 갈등의 순간도 있었다.

아내와 내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 30대 후반에 찾아왔다. 간음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상대방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 줬다. 슬픈 사실이지만, 나는 때로 지나치게 화를 내서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간통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한편으로는 아내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죄악 된 욕망을 채우고자, 어쩌면 간통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한 분이신 거룩한 하나님은 간음을 싫어하신다. 나는 결혼 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주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계속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의 의로운 명령은 내 힘이 약할 때 나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성경의 진리는 내 발걸음을 지켜 주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결혼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결혼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내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우리에게 세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죄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죄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죄는 우리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힌다. 또는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제 모두 끝났어! 내가 어디 당신을 용서하나 봐!"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당장 끝났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선택은 모두 화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에게 너무 실망했어. 내게 큰 상처가 됐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내게 준 아픔을 다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해. 그래서 당신을 용서하겠어.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아냐. 하지만 당신에게 악의를 품고 영원토록 서먹서먹한 사이로 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난 당신의 실망스러운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용서로 치료하겠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죄는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러나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은 우리를 잊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떠안으시고, 거룩한 마음으로 우리의 사악함을 받아들이시며,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감당하셨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 열린 마음으로 우리와 화해하고 다시 동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상실과 폭력, 고통으로 얼룩진 세상을 속죄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다른 어떤 종교도 감히 우주의 창조자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공의로운 주권자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야 우리는 십자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꽃 같은 거룩함이, 넘치는 자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우주의 창조주는 사실 온화하고 사랑 많은 아버지시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들은 이 거룩하신 재판관과 영원히 분리될 것이라고 연이어 경고하셨다.

성경의 하나님은, 돌아와서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불꽃 같은 거룩함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경외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때야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과 죄와 구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야 우리는 신앙의 용기와 강건함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를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교회는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고,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부와 건강, 행복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처럼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는 거룩함을 행복으로 대치하고 싶어 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아무 힘도 없고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오묘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거룩함과 사랑을 함께 지니고 계심을 알았다. 성전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난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의 죄에 압도당하고 말았다(이사야 6:1-5). 그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수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때로 우상을 숭배하고,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을 늘 잊고 살았다.

바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강조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로마서 1:18)).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의 저주를 경고하셨다. "또 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영 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중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절반뿐이다. 이사야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즉시 천사를 보내어 그의 죄가 사해졌다고 안심시키셨다. 그때야 이사야는, 하나님을 날기 위해 연습하다가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구하려고 부드럽게 날개를 펴고 내려가는 어미 독수리에 비유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헐떡일 것이라(이사야 42:14, 49:15)." 하나님은 어머니가 아이를 위로함같이 우리를 위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이사야 66:13).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그들을 용서할 채비를 갖추시고, 애태우며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 베드로는 넘치도록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베드로후서 3:9).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계신 주권자이자 의로운 재판관으로 알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분이 또한 아버지시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우주의 창조자를 부를 때 다정다감하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죄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얼마나 사악한 반역을 저질렀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아버지의 품으로 기꺼이 받아 주려 하신다.

한 손에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사랑과 용서가 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모두 깨닫게 될 때만이, 참으로 죄와 구원을 이해할 수 있다.

죄는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정도로 아주 심각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로 벌을 받은 흠 없는 인간 정도로 본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거기 못 박힌 사람은 바로 삼위일체의 제2이신 분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바로 하나님이 성금요일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죄가 너무 심각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죄에 대한 증오보다 크셨기 때문이다. 죄는 너무 심각해서 가벼운 질책이나, "다들 그렇지 뭐"라고 상냥하게 말하는 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우주를 일그러뜨린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립힌다. 죄는 지구를 파괴한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죄를 벌하실 수 있다.

하지만, 성부께서는 우리를 그의 거룩한 품으로 다시 받아들이기를 몹시 원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시고,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도 우리의 어리석은 반역을 용서하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 그 이상을 하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정말로 하나님은 인간과 사회와 심지어 창조 세계까지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원하신다.

만일 구원이 단지 용서뿐이라면, 그것이 거듭난 경험을 통해서든 아니면 성례전에 꾸준히 참여함을 통해 받는 것이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인종 차별이나 음란한 생활, 이기적인 행동을 바꾸지 않고도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한 용서, 그 이상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이상이다. 구원은 반드시 믿는 이들의 성품과 생활 방식을 변화시킨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회개하고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거룩한 새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기준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죄악 된 행동 양식을 이길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라디아서 5:24).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 사이의 거대한 틈에 다리를 놓으셨다고 가르친다. 신자들은 거룩하시고 온화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고 그분의 영광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고린도후서 3:18)"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만 향할 때, 성령은 참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인격을 치유하시며, 우리를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용서받은 사실에만 안주하여 인격의 성화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홀로 성인으로 사는 데 만족하여,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회복시킨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교회에만 매달리다, 사단이 심각하게 왜곡한 창조 세계와 사회를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죄의 해악을 모두 깨끗이 쓸어 내기로 맘먹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거룩한 삶은 결코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개인의 행복과 자기실현을 목표로 설정한다면, 숨 막힐 듯한 권태감을 느끼며, 끊임없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되는 악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보다 거룩함을 추구할 때, 행복도 더불어 얻게 된다.

아내와 나는 개인적인 삶 속에서 이러한 진리를 발견했다. 결혼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새롭고 깊은 즐거움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휩쓰는 지옥 같은 시간과 파탄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실수나 죄와 고통이 가장 좋은 인간관계에도 슬그머니 끼어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위험한 순간에 화해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값비싼 용서뿐이다.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결혼 생활은 회복될 수 없다. 부모와 자녀는 화해할 수 없다. 인종이나 성별의 차이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은 무너질 수 없다. 경제적 계층 간의 화합은 있을 수 없다.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깨어진 관계들은 훨씬 더 심각한 불화를 일으킬 뿐이다.  서로 용서한다면, 지금이나 혹은 나중에라도 문제가 온전히 풀릴 것이다. 서로 용서한다면, 그리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면, 서로 용서하고 회개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회복과 정의가 세워지고, 온존한 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로날스 사이더, IVP -

새글 0 / 30 

검색

  • 완전은 완벽이 아니다-이진경
  • 작성자 : | 조회수 : 172 | 등록일 : 2022.01.10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재차 말씀하셨다. “완전하여라.” 그저 완전만이 아니다. ‘하나님처럼’ 그래야 한다는 조건은 가뜩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더욱 더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유한하고 내재적인 인간이, 감히 어떻게 ..
  • 따로 떼어 놓은 짧은 시간
  • 작성자 : | 조회수 : 233 | 등록일 : 2021.03.26
  • 1801년,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영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의 국회의원으로서 대영제국의 노예 폐지를 주도했던 그에게 닥친 영적 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정치적 야망이라는 소용돌이였다. 만약 그가 이 위기 앞에서 무너졌다면 19세기 영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 위기는 총선에서 헨리 에딩틴(Henry Addington)이 차기 수상으로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 위대한 설계자/ Billy Graham
  • 작성자 : | 조회수 : 252 | 등록일 : 2021.03.26
  •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우연이나 알 수 없는 진화의 과정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뒤바꾸거나 변덕을 부려서가 아니다. 창조라는 의도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여기 두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온갖 상상을 동원해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만..
  • 불꽃같은 거룩함, 용서하는 사랑
  • 작성자 : | 조회수 : 366 | 등록일 : 2020.11.27
  • 아내와 나는 33년 동안, 리처드 포스터가 적절하게 표현한 대로 "황홀함과 악취가 뒤섞인" 삶을 살아왔다. 아내와 함께해 온 시간은 대부분 즐거웠다. 그러나 갈등의 순간도 있었다. 아내와 내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 30대 후반에 찾아왔다. 간음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상대방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 줬다. 슬픈 사실이지만, 나는 때로 지나치게 화를 내서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간통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
  • 성장의 시간, 겨울을 맞이하다
  • 작성자 : | 조회수 : 327 | 등록일 : 2020.11.08
  •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삶에서 불완전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하시는 정화 작업을 겨울을 맞이하는 식물의 세계가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찬바람의 날개를 타고 추위가 찾아오면 나무들은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초록빛 잎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듯 갈색으로 퇴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 갖기 쉬운 다섯가지 그늘
  • 작성자 : | 조회수 : 455 | 등록일 : 2017.08.02
  • 우리가 그늘보다 빛을 더 많이 드리우고 싶다면 내면의 어떤 괴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들이 만들어낸 그늘을 탐험하고  우리 자신의 영적 생활에 뛰어들 때 찾아오는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그런 괴물 5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울증으로의 하강의 경험 속에서 그것들과 각각 친해졌다. 1)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 많은 이들이 특별히 리더인 경우에 외..
  • 안으로의 여행
  • 작성자 : | 조회수 : 467 | 등록일 : 2017.08.02
  •  우울증의 늪에서 빠져나와 나는 이제 현실에서 리더쉽이라는 우리의 공동의 소명에 관심을 돌린다. "내적 여행을 계속하라, 에고를 지나처 참자아에 이르라, 그러면 자아도취에 빠져 헤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따르는 책임감을 좀 더 늠름하게 간직한 채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도를 받아야 하..
  • 영혼의 고통에 다가가기
  • 작성자 : | 조회수 : 443 | 등록일 : 2017.08.01
  •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 상태이다. 우울증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 버린다. 이상하게도 내가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잠깐 찾아왔던 어떤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의 나는 누가 곁에 있고 누가 없었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느데도 말이다. 호의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던 그들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욥의 위안자'와 같았다. 비참한 처지의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