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없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도 없었다.
이 자명한 이치를 왜 거부하는 것일까?
우리를 이루고 있는 본성은 우리를 생태계에 존재하는 유기체처럼 만들어 놓았다.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어떤 관계에서는 번성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시들어 말라죽는다.
나는 한계에 대해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어느 교육기관의 대표직을 제안받았을 때
나는 내 소명을 식별하는 것을 도움받기 위해 6명의 친구들과 대화를 했다.
조언이나 지적이 아니라
상대가 내적 진실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질문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내가 그 대표직을 제안받았음 자랑하고 싶었다.
"당신이 그곳의 학장이 되면 어떤 점이 제일 좋습니까?"
수많은 평이한 질문들 속에 쉽지만 어려운 질문이 나에게 던져졌다.
내 변명같은 대답에 계속되는 같은 질문
"아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신문에 내 사진과 함께 그 밑에 학장이라는 직함이 실리는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은 우스웠지만 그 순간 내 영혼은 위태로웠다.
"파커, 실문에 날만한 더 쉬운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나요?"
학장이 되려는 내 바람은 내 본성을 따르기보다는
내 에고와 훨씬 많이 관련이 되어 있었다.
난 그 미팅이 끝난 뒤, 내 이름을 빼달라고 그 학교에 전화했다.
더 좋은 대답을 댈 수도 있었다.
"학생들이 본받을 만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든지
"참자아를 찾는 사람들을 돕는 상담자"라든지
"정의롭고 투명한 운영과 합리적인 절차의 수립을 위한 행정가"라든지...
하지만 그것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바람직한 의무이지만
내 능력 밖의 일들이었다.
만약 내가 본연의 나와 상관이 없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한동안은 남에게나 나에게 내 모습이 근사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내 한계를 넘어선 사실은 결국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 자신과, 남을,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된다.
결국은 '그 좋은 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더 큰 해학을 끼치고 만다.
내가 나의 본성, 관계의 본성이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덤빈다면,
그 순간 나의 등 뒤에서 길이 닫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