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도록 어떤 추상적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본성, 즉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존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렇지 않는 삶을 살려 할 때
현실의 힘이 우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등 뒤에서 길이 닫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도덕적 기준은
우리가 손 내밀어 잡아야 할 무엇이 아니며
도덕적 결과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바로 지금, 여기있다.
내가 '나와 너' 관계에 따르는지 거역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능력과 한계를 가진 우리의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우 도덕적인 삶이다.
"선한 사람이 더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완전해지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올바름이 화려한 면허증이었던 데 비하면
험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John Middleton Murry
하나님은 도덕 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와 자아의 근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산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거스림이 아니라 그대로 존중하며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하다.
내 영혼의 구멍을 채우려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빈공간에 대해 더 잘아아 거기에 빠지는 것을 피해감으로써
나는 교사로서의 부르심과 내 안의 본성에 충실하려 한다.
교사로서 내가 가진 재능은 학생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능력,
대화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가르치고 함께 배우는 능력이다.
학생들이 기꺼이 나와 함께 춤을 추면 그 결과는 아름답다.
교사로서의 나의 한계는 그 춤을 강요하지 못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춤추기를 거부하고
내 재능이 거부당하면 일은 엉망이 된다.
나는 괴롭고 화가 나며 학생들을 원망한다.
나는 그들을 대할 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함께 춤을 춘다는 일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약점이 내가 가진 강점의 댓가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새로운 해방의 기운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내 약점을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나와 함께 춤추고 싶어하지 않을 때는
솔로로 혼자서 춤을 추는 법을 배운다.
나와 춤추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품위있게 대응하는 법을 배운다.
내 한계를 그들 탓으로 돌리는 대신에
내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사코 춤을 추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학생들에게까지
좋은 선생님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며 바운더리이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계속해서 춤추자고 불러낼 수 있는 이해심을 키울 수는 있다.
단 몇의 학생들이라도 내 음악을 듣고 초대에 응해서 나와 함께 가르치며 배우는 댄스 무대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