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늘보다 빛을 더 많이 드리우고 싶다면
내면의 어떤 괴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들이 만들어낸 그늘을 탐험하고
우리 자신의 영적 생활에 뛰어들 때 찾아오는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그런 괴물 5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울증으로의 하강의 경험 속에서 그것들과 각각 친해졌다.
1)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
많은 이들이 특별히 리더인 경우에 외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 그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향성은 때로 자기 불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아니면 단지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외적 활동으로 뛰어든다.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어떤 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역할을 빼앗기면 깊은 좌절과 감정의 절벽에서 떨어져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방편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빼앗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정체성이란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이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간단한 사실에 달려 있다.
2) 세상은 전쟁터이며 사람에게 적대적인 곳이라는 믿음
우리는 전쟁, 전쟁터의 이미지를 회사와 일, 삶에 자주 적용한다.
이런 이미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넓은 전쟁터이기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상상에
우리를 빠지게 한다.
실재로 우리 인생에는 이 상상이 현실로 경험하곤 한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이 마치 전쟁터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세상은 경쟁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대게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경쟁이 아닌 합의와 협동, 공동으로 일하는 것을 지향하는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예언을 성취하며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내적 여행의 과정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은
세상은 영원히 함께 작용함을 깨닫는 통찰력이다.
현실이라는 구조는 전쟁이라는 구조와는 다르다.
현실은 사람을 잡아먹고 잡혀먹는 곳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현실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조화라는 영적 진실이다.
3) 모든 일에 대한 최후의 책임이 우리 인간의 몫이라는 믿음
이것은 이 땅에서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면
그 일을 일으켜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다.
이 그늘은 사람의 모든 단계에서 병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우리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도록 하며,
관계를 지나치게 압박해서 때로는 단절에까지 이르게 한다.
종종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사실에 화가 난 나머지 탈진이나 우울증, 절망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런 '기능적 무신론'은 때로 집단 광란을 유발하는 그늘이 된다.
그것은 왜 보통의 그룹이 15초의 침묵도 참지 못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어떤 소리라도 내지 않고 있을 때는 아무런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뭔가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적 여행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은
세상에는 우리만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른 활동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떤 것들은 우리보다 더 낫다.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짐을 우리가 져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함을 누릴 수도 있다.
4) 두려움, 특히 인생의 혼돈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혼돈의 잔여물을 없애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정돈하고 배열하여
다시 혼란스러움이 일어나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혼란의 의미는 의견의 차이, 혁신, 도전 그리고 변화 같은 것을 의미한다.
가장, 학교, 기업과 종교는 이 그늘을 규칙과 절차를 엄격하게 함을 통해
권한과 자율성의 부여가 아니라 구속의 분위기를 통해
혼란을 가두워 두려고 하지만
사실 갇히는 것은 우리 자아이며, 혼란은 구속을 깨고 나오려 발버둥 친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는 이 혼돈이 사실은 '창조성의 전조'라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인생은 무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창조된 것들은 때로 죽음과 혼돈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부활이 경험되며, 더욱 생기 있는 형태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5)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부정
어떤 것을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죽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땅의 모든 것은 정해진 때가 되면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부정하며 산다.
죽음을 부정하며 사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미 죽은 것을 부활시키라고 요구한다.
오래 전에 끝냈어야 할 과제와 프로그램이,
죽음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리더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계속 살아 있게 된다.
죽음을 부정하는 심리 내면에는 또 다른 두려움이 숨어 있다.
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실패는 해고 통지서를 의미한다.
비록 그 실패가 지고지순한 이상적 목적을 수행하다 나타난 결과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가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학자를 생각해 보라.
실험의 실패를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는 연구실의 연구자들처럼
때론 성공한 하나의 가설보다 수많은 실패들이 진리를 더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모든 환경에서 최고 리더는 실패가 뻔한 일이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에게 포상한다.
이들은 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배움의 원천임을 알고 있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가 얻는 선물은 결국은 모든 것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끝은 아니다.
생명이 다한 어떤 것을 죽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