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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아 듣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내용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의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표정과 몸짓에 담겨있거나, 마음 속에서 아직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알아 듣다”는 말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이해하다는 뜻인데, 우리가 하는 말을 통해서 일어나는 교감, 교통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알아듣다”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표현합니다.
잘 알아듣는 능력은 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잘 알아듣는 능력은 상대를 향한 내 마음과 상대를 향한 내 관계의 깊이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말로 자신의 필요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자녀들의 옹알이를 다 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알아들음”의 교감과 이해가 줄어 들어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알아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알지못한다는 탄식이 부모와 자녀, 양쪽에서 아픈 신음처럼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부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저의” 곧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속에 숨긴 생각이나 의도를 추측하는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 궁예의 관심법이라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말입니다.  그 관심법이 자기 가족과 부하들에 대한  궁예의 불신과 공포, 두려움의 표현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뱀의 대화의 핵심은 “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저의”에 대한 토론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단순히 “너희가 죽을까봐”였습니다. 사단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싫어서”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죄의 시작을 의심이라고 할 때, 그 의심은 “너희”라고 상대가 지칭하고 있는 “나”라는 자의식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라는 자의식이 내 앞에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제한시키는 불편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목사로서 교우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그들의 형편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조금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 더 알아듣게 됩니다.  “무슨 의도였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신뢰하는지에 달려 있다는것을 깨닫습니다. 내 안에 부정적인 생각이 답으로 떠오를 때, 그 생각은 사실을 의미하다기 보다는 “그 사람을 향해 내가가지고 있는 태도나 관계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 마음을 제일 아프게 하는 저에 대한 소문은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했던 말이나 행동을 안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닙니다. 밤잠 이루지 못하게하는 아픈 말은 내 마음 곧 내 의도, 저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입니다. 오해받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 그것은 내 행동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동기에 대한 오해인 경우가 많습니다. 설명이나 해명이 더 큰 오해의 불길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냥 속으로 삭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처럼 “제가 그 마음 알아요” 한마디에 녹아 내리는 마음이 눈물로 분출됩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예리한 칼날로 찔러 영원의 고통을 주는 일에 주의해야 합니다. 

의도에 대한 의심보다는 그 상대를 더 알기위해 노력합니다. 부정적인 의심보다는 그 사람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십시오. 마음에 대한 오해를 받았을 때, 그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한 사람, 혹은 소그룹(순모임)에 속해 있으십시오. 내 마음을 의심하는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위로와 힘은 의심의 상대가 아니라 친구와 사랑의 상대에게서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