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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에 대한 단상
어떤 생각을 하며, 여름을 지나고 계십니까?

내 마음의 생각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밤에 잠 못이르게 하는 이유가 ‘내일’에 있지는 않습니까?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손에 넣어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도는 과거를 향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글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교우들 중에 몇이나 과거의 일을 자책하고, 과거의 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회개” 조차도 ‘우리 앞에 곧 임할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내일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욕구가 끝을 모르고 달려가게 하는 유혹의 단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기도를 살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기도들은 오늘보다는 내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기도는 기도를 듣는 하나님, 기도를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내일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는 기도는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를 위한 내일에 대한 기도, 내 자녀를 위한 내일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 중에 멏명이나 “내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복음이 전해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을까요?

“내일”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이 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즉 자기를 위한 내일에 민감했던 이 부자는 그 내일이 자신의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야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바로 이 주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바울은 너희의 내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내일을 기대하고, 내일에 민감하는이유는 내일이 곧 그리스도께나 나타나실 때이며, 그 때가 우리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일을 위해 더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더 큰집, 더 많은 것을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된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부끄러운 말을 버립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을, 그 행실을 함께 벗어버립니다. 음행과 더러움,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입니다.

“죽인다”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이고, 절실한 몸부림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내 자존심과 욕망을 거슬리는 몸부림입니다. 그리고 이 몸부림은 끊임없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이 오늘의 만나로 하루의 생명과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내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고백을 해야만 했던 훈련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 기도는 어떻게 우리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저는 참 고민스럽습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오늘을 위한 양식이라는 말이...   내 마음과 눈은 오늘보다 더 나을 내일을 보고 있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