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이유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마치 9월처럼 느껴집니다.
다음 주가 지나면,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삶이 시작된디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무겁습니다. 올해는 학교와 학년에 따라 9월 3(화)-4일(수)가 개학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캐나다에 사는 우리에겐 매해 3번의 시작의 기회가 주어지는 듯합니다. 양력 1월 1일, 음력 1월 1일, 그리고 아이들의 개학이 있는 9월 첫 주입니다.
에이미의 학교 개학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 수업과 활동을 위한 용품들을 사고, 책가방을 살펴보고, 학교에서 보내오는 이메일들을 꼼꼼히 읽어 봅니다. 이때쯤이 항상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내 아이가 새 학기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잘 배우고, 기존의 친구들 몇몇과 같은 반이 되며,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해 주세요.”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를 만나기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아이가 좋은 학생이 되며,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위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8시간이나 차을 타고 달려가야 하는 몬트리올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 선영이를 홀로 두고 방문을 나설 때의 감정이 아직도 제 마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6천명의 시골에서 300배에 가까운 인구가 사는 도시에서 홀로서야 하는 아이를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8시간 내내 기도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벌써 올해가 대학 마지막 해입니다. 내년 5월에 졸업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의 제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을 떠나는 고생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는 선규는 3년째 대학 생활을 시작합니다.
아직 정확한 진로를 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1, 2학년의 빈 공간을 채우는 해로 하자” 과를 옮기는 것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 전에, 망쳐놓은 2년의 무너진 틈들을 다시 매우는 해입니다. 선규를 위한 기도도 사실은 에이미를 위한 기도와 같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박종국 목사님의 룻기 이야기 속에, “선대”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자 자신들의 남편)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재혼을 하여 그 남편의 집에서 위로받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나오미(시어머니)의 오르바와 룻(며느리들)을 향한 “선대”의 말에 두 며느리가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하며 웁니다.
우리들의 마음 저 깊은 곳, 그 중심에는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며, 내가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목마름으로 매말라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내가 너와 함께 가며,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를 대적하고 저주하는 자를 내가 대적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그래서 당신이 나를 축복하고, 나를 대접해야 된다”고 만나는 상대의 선대를 먼저 강요하는 구실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다른 사람을 선대하고, 자기의 장막에 들여 대접하여,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과 영혼을 구하는 일과 자녀를 키우고 배우자를 사랑하는 가정을 만드는 일과 내가 만나는 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는 일의 원리는 하나이며, 동일한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 7장 12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앞에 말씀은 “너희가 악하여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과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판단하지 않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새학기에 좋은 만남과 관계, 그 속에서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는 요즘, 그 좋은 만남과 관계는 먼거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타인을 판단하고 비난하기 보다, 먼저 선대하는 행동 속에서 시작된다는 기초적 원리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실천을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학년, 새학기에 우리 아이들이 만나는 선생님들과 학교 동료들로부터 선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문화와 언어로 씨름하는 하루 하루의 삶에 내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떠들고 놀아주는 이들의 은혜가 먼저 우리 아이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선대를 먼저 배푸는 아이가 되길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 누군가를 친구로 불러줄 수 있는 선대의 능력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과 성품, 용기와 다정함을 통해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 아이들의 도움이 되시는 선대를 베풀어주소서.
룻기의 이 선대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