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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고, 만져 알게 되는 하나님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흔한 말로, 일본에만 8백만개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신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발울처럼, 이 땅에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인간의 육체를 불편하고 거북한 것, 불결하고 제한된 것,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했던 시절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신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감정을 배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은 홀연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깐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던 어느 작은 마을, 작은 나라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신은 무감각, 무감정이라는 완벽한 원형의 이미지로 추앙받던 시절에, 정말로 연하디 연한 새싹(순)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태어남은 아버지로 크리스마스 아이를 안았던 요셉에게는 10여개월의 긴 침묵이 더 무거운 인생의 무게가 되었습니다. 산고의 고통 끝에 갓난 아이를 품에 안았던 마리아에게는 말 못할 수치와 고난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베들레헴 인근의 2살 이하 남자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통곡의 소리가 하늘을 채웁니다.

단순하게 우리가 고백하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고백은 우리 몸의 앙상한 뼈들처럼, 2000년 동안에 서서히 메말라 앙상한 가지만 남은 마른 나무의 무감각한 고백입니다. 그 이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어보겠습니다. “그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이해를 넘어 계시던 분이 우리 인생의 일부로 오셨습니다. 우리처럼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지고, 들려지고, 만져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을 이것을 사귐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느 것(요17:3)”도 마찬가지 입니다. “안다”는 것입니다. 이 “안다”는 단어의 첫 등장은 창세기 4장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게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에서 “동침하다”는 단어가 바로 이 “안다”는 단어입니다. 관계 속에서, 체험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고, 느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식에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입니다. 성경의 먹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백종원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어도, 만들어서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최초의 제자인 안드레와 요한이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의 선포를 따라,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요했다면, 예수님과 안드레, 요한 사이의 대화를 성경은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함께 밤을 세웠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세리장이었던 욕심많고 열등감과 수치를 부와 권력으로 감추던 삭개오의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설교를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 먹고 마셨다. 그리고 삭개오의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변화, 즉 회개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가졌단 사귐처럼, 자신이 적대시했던 이들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처럼 인간이 되셨습니다.” “어린 아이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원초적 관계 속에서 사귐을 시작하셨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태어난지 8일이 된 하나님을 품에 안았습니다. 이 사귐이 초대교회에서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물질을 하나님께 내어 놓게 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이 “사귐-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사귐을 위해 우리처럼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귐의 극치는 내 삶을 그 상대를 위해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이 탄생의 목적에 의한 결론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허공을 찌릅니다. 공허합니다. 말과 정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으로 태어나시면서 회복하고 싶으셨던 이 사귐은 아직 멉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올해에도 다시 태어나십니다.  저는 성탄절이 아련하고, 슬픕니다. 레시피에 불과한 내 신앙이 서럽습니다. 올해에도 분주함과 안일함 속에서 홀로 태어나시는 그 분이 가련합니다. 
오히려 그 분은 내가 아닌 어쩌면 성탄절이 가장 외롭고 슬픈 밤인 이들과 함께 있을지도 모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