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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묵상 #11)

사순절 묵상 #12]요한복음 129-42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두 제자가 예수를 따라갔다... 안드레가 다음 날에 자기형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앞으로 너를 게바(베드로 곧 바위)라고 부르겠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 선언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언급합니다.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세례요한처럼 나에게도 분명한 역할과 목적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은 속죄일의 대속에 관한 언급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유월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죽음의 천사가 각 집을 통과하여 가는 공포와 죽음의 어둠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빛이 되어,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를 위임받아 광야로 내몰리는 양의 이미지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려주는 깨끗함과 자비의 약속에 대한 상징처럼 나를 덧입혀주는 의복(왕의 식탁 앞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자격에 맞는 복장)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흠없고 정결하여,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설 수 있고, 우리를 위해 대변할 수 있는 대언자입니다. 이 대언자(변호자)가 하나님 앞에서 나와 이 세상을 위할 때, 누가 대적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어린양의 능력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을 찾아가, 그 분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내가 인정하던 권위나 따르고, 즐기던 편안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말씀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말씀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와 또 다른 제자는 오후 4시에 예수를 만납니다. 유대인들의 시간은 오늘날 저녁 6시를 하루의 끝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예수를 만나면, 새로운 내일을 오늘로 가질 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서 시작되는 새날의 즐거움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지만,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잠들기 전에 묵상을 하는 것도 참 좋아 보입니다. 그 말씀 안에 잠들었다 깨어나는 새날은 마치 우리가 약속을 붙들고 죽었다가 눈을 떠 들어가게 될 새하늘과 새땅의 경험을 매일 하는 것일수도 있으니까요.


세례요한이나 안드레와 다른 제자 그리고 베드로처럼 자신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 안에 있을 수 있을까요?. 세례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에게로 떠나보내고, 안드레는 자기 형제를 예수에게 인도합니다. 이 두 사람의 다른 행동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을 다 예수를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롭고 깨끗한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떠나보냄데리고 옴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을 통해 고백되어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할 것(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거나, 사랑을 받는 것이 내가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니까요. 내가 예수에게로 데리고 와야할 것은 무엇니까? 꼭 사람이 아니라, 내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귀한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 드려지면 더 좋을 것()같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