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 # 20]
마태복음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모세가 “하나님이 스스로 쉼으로 만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선포한 대상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노역을 담당했던 당대의 히브리인들이였습니다. 노예의 삶은 피지배자의 삶으로, 지배자와 삶의 질이 다릅니다. 노예로서 히브리인들은 쉴 자격, 쉴 능력이 박탈된 이들이었습니다. 다른말로, 고대시대의 자유인의 특징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였습니다.
안식(일)은 출애굽하여 자유인이 된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십계명의 4번째 즉 하나님-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에 근거를 두어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의 범위는 나와 관련된 모든 영역(내 가족, 종들, 가축들, 내 집에 거하는 손님들)이 포함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두 번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안식을 창조와 연관합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뒤, 신명기 5장에서는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안식과 연결시킵니다. 쉼(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유로운 이들만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쉼으로의 초대”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들만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성공”과 “성과”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는 내가 다 소비되어질 때까지, 나 스스로를 얽어매어 내 눈에 보이는 당근을 먹기 위해 달리는 말처럼 살게 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이며, 지배자 같지만, 사실은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던, 주 5일 근무로 이틀을 쉬던, 곧 보편화 될 사흘을 쉬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이 시대는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며, 개인과 가족의 쉼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캠핑장에서 내 아이에게 수학문제를 풀게 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쉼은 없습니다.
“안식(일)은 저항입니다”라는 유명한 신학자의 문구를 떠올립니다. 시대와 문화를 거슬러 안식을 나누고, 쉼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시기로 들어갑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해 주는 용납에서 “죽고 사는 문제 앞에 서니...”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더라는 믿음의 고백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쉬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시기는 급한 커브를 도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걸을 때도 있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있지만, 모든 길은 곧 커브를 만나게 됩니다. 이 커브는 우리로 깨어있게 하고, 긴장하게 하고, 나와 다른 이들의 안전을 살피게 합니다.
오늘 아침에 기도는 “이 강제적인 쉼”의 의미를 또 다른 형태의 개인주의, 성과주의로 오염시켜 버리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 쉼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배움의 시간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이 안식이 내 삶에서 넘치면, 그 생수가 내 가족과 이웃, 교회를 넘어 흘러갑니다. “생존”과 “건강”이라는 목표는 나 혼자 혹은 경쟁 관계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서로 문안하고, 관심을 나누면서,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급하고 경사진 이 굽은 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강제된 2주간의 쉼을 잘 쉬어야, 앞으로 2달을 더 갈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평안한 쉼의 복을 받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