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개
[사순절 묵상 #36] 침묵 대신 선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순절 묵상 #36] 마가복음 1453-72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24시간 안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을은 음력을 달력으로 사용하고,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지는 오후 6시로 계산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간개념을 우리 상황으로 표현하면, 새벽, 어둠이 가장 짙을 시기에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의 사병들에게 붙잡히신 것입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자치구로 인정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헤롯왕처럼 정치적 권력을 인전한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의회-종교적 지도자들로 구성된-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권력이라서, 정치적 권력의 핵심인 빌라도 총독의 승인이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침묵에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서 537절의 모습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들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침묵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내일 읽을 본문에서는 빌라도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 스데반 집사와 초대교인들, 마틴 루터 킹 jr.나 많은 위인들은 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무법자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는 것이 분명한데,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들어서는 예수님과 비교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 버리는 베드로입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숨겨버립니다. 내가 숨겨지면,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닙니다. 이 두려움의 악몽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가윗눌림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한번이 아니라 세 번 닭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나약함의 울음이 아니였습니다. 그 눈물은 베드로를 주님에게 묶는 줄이었습니다. 이 줄이 매여 있는 한, 세컨 챤스는 언제나 우리의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또한, 저는 가끔씩 예수님의 눈빛을 생각해 봅니다. 그 분의 눈빛에는 항상 사랑이 담겨 있었을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다정함과 용납으로만 표현될까? 베드로는 다양한 예수님의 눈빛을 경험했을 것입니다.“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정말 점잖은 목소리와 다정한 눈빛으로 갓난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처럼 말씀하셨을까? 30대의 혈기왕성한 예수님이 화를 내실 때, 그분의 눈빛은 어떠셨을까? “내가 요한을 내가 올 때까지 살려주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너에게 주어진 길을 가면 된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눈빛은 어떠셨을까요? 다른 복음서는 베드로의 부인과 닭 울음에 예수님이 뒤를 돌아, 베드로와 눈을 마주치셨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님의 눈빛은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는 다양한 예수님의 눈빛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다양한 눈빛을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어떠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