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적인 성찰의 경험없이도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시 139:1)."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두려운 것으로 경험하지 아니하고 무한한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경험했습니다.
성찰의 기도란 의식의 성찰 + 양심의 성찰이 동전의 양면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한 의식의 성찰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상과 감정과 행동들을 조망하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의식의 성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환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이 의식의 성찰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있는 위치(정황)을 인식하게 되며,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듣는 중에 하나님의 발자취를 발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의식의 성찰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이 얼마나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지...
에벤에셀의 돌(삼상 7:12)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 추억하는 것을 돕습니다.
의식의 성찰로 우리는 하나님을 초청하여 우리의 마음 속을 깊이 살펴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찰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우기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스스로 학대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의 손상된 자아관 때문에 너무 지나친 내면 성찰은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아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의 성찰을 의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의 성찰은 자아 성찰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 나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성찰의 기도는 우리 안에 자아 인식이라는 값비싼 은혜를 만들어 냅니다. 자아인식의 가치는 청말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려고 할 때, 우리가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용납하는 일에 근거해 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경험과 삶의 정황 속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우리의 강함과 약함으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재능 뿐 아니라 약점, 이중성, 욕망, 게으름과 같은 우리 모습 모두가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완전하고 꾸밈없는 자기 의식이 우리를 유지하고 지탱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 순전한 모습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의 문을 찾아라. 그러면 그 문이 하나님 나라의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존 크리소스톰 -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내면 세계의 성찰을 통해서 당신은 하나님이 자석처럼 끄는 힘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하나님은 자석과 같다. 하나님은 본래의 당신을 점점 더 자신에게로 잡아 끌어 당기신다" - 귀용부인 -
의식의 성찰을 위한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영적 일지를 쓰는 것이다.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뫠, 무엇때문에 했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점에서 일기와 다릅니다.
양심을 성찰할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영적 일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마틴루터는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표준에 비춰볼 것을 권면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정한 기간을 수양회나 리트릿 센터에서 보내는 조용한 시간을 통해서 성찰의 기회를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