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과 기도
2018년 2월 28일,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7)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마태복음 18장의 가르침을 누가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리다는 말에서 비롯된 단어로 ‘어리석다’는 것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은 지적인 능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성숙’의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일까요? ‘어른들과 그들이 이루는 사회’가 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어떤 면에서 여전히 어리석습니다. 여전히 성숙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스스로 해 낼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다는 어른들과 어른들의 사회적 기준을 내려 놓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봅시다. 한 엄마가 들려주는 5살난 아이의 주일학교 이야기입니다.
“교회 주일학교를 마치고 나오던 정연이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참 잘 그렸네, 선생님께서 예수님을 그려보라고 하셨어?”
“아니, 선생님이 내가 care해야 할 사람을 그려보라고 하셨어.”
순간, 나는 ‘정연이가 care의 뜻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연아, care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고 있니?”
“응, 친구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고, are you OK? 하고 물어봐 주고, 걱정해 주는 거야.”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그렸어?”
“응, 엄마.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잖아.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care해야지.” 5살짜리 아들의 신앙고백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마음에 불평이 가득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 시간에 갑자기 교수님이 20달러를 꺼내더니 한 학생에게 주었습니다. 이 학생은 아주 불편해 하고, 의아해 하면서 20달러를 똥 묻은 휴지를 주어 든 것처럼 어정쩡 했습니다. 학생들은 다 낄낄거리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만약 그 20달러가 네가 우리 집 잔디를 깎고 받은 돈이라면 어떨까?” 물었습니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돈이죠.” 저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럼 만약에 내가 그 20달러를 한 아이에게 주었다면 그 아이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Thank you”라고 하고 받았을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수 아는 능력! 아이의 능력입니다. 마음을 줄 줄 아는 능력! 아이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선물이며, 그 선물이 좋아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