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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변화에 대해 1
우라는 간헐적으로 은혜를 경험합니다.

대학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적인 거장 중에 “빌 브라이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저는 ccc라는 선교단체 출신입니다. 빌 브라이트는 ccc를 시작하고 이끄신 분입니다. 이분을 직접 얼굴로 뵐 기회가 4번 있었습니다. 이분의 설교는 항상 성령충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성령충만을 받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한 배움을 계속할 수록 내가 경험하는 성령충만과 빌 브라이트가 경험하는 성령충만의 질이 다르다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 같은 “성령” “같은 성령충만의 기도”인데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나 파장의 크기가 다른 것일까... “성령충만을 받으라”라는 명령이 “성령충만을 주신다”는 선물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의 차이일까?

학생들에게 성령충만의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 갈등은 더욱 커졌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에서 자신의 전 삶을 통해, 성령과의 동행을 강조하는 빌 브라이트와, 제가 강의하는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은 분명 내용은 같은 것인데, 내 안에서 확신, 배우는 학생들에게서 보이는 결과가 달라보였습니다.

이 고민을 이렇게 풀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아주 가끔씩 성령충만을 경험합니다. 찬양을 부르는 중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예배를 하고, 설교를 듣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영적 활동들 속에서 가끔 성령충만함을 경험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함을 알고 경험하는 때에 나의 마음과 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열린 태도가 성령충만한 상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회개가 터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에 대한  결단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찬양이 멈추면 곧 내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생각들로 가득차 버립니다. 교회 문을 나서는데 머리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에 내 마음엔 불평과 염려로 가득 찹니다.

빌 브라이트라는 영적인 대가의 성령충만의 일상화와 내가 경험하는 파편적인 성령에 대한 경험의 차이가 ㅇ어디에서오는 것일까?

어느날, 그 차이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결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 브라이트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결단을한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인생의 최우선을 둔다. 제자의 삶을 살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데, 본인의 이름으로 된 재산은 하나도 갖지 않는다. 기도와 성령보다 앞서서 어떤 일을 행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우선을 둔다.... 등 등 그의 삶은 밑바닥부터, 기초부터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삶 수 없없으니,성령이 나를통해 사시옵소서” 라는 고백이 그의 성령충만의 기초였습니다.  

문제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의 토대와 동기가 다르니, 빌 브라이트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내 신앙은 “성령충만의 카피, 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대가들의 깨달음과 삶과 우리의 삶의 차이는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 태도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과 삶의 토대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한님에 대한 헌신이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내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헌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실, 나는 내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자녀들의 문제로 시름하며, 내 주변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위한 생각과 행동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홉게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영이라면,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때에만 경험되어지는 영입니다라고 동의하고, 그런 삶을 원하지만, 내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내 신앙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성령이 오신 목적에 부합한 태도와 삶의 결핍 때문이지 않을까?
(다음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