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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 39] 고요한 적막 속에서
[사순절 묵상 # 39] 마가복음 15:33-47

고요한 토요일 아침입니다. 주님이 무덤에 갇혀 있으셨던 날도 적막에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고요하고, 새들과 짐승들도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종교, 정치적 권력자들의 안도의 한숨과 소리 나지 않는 미소와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들의 나지막한 흐느낌이 버물어져 있었을 그날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있었던 일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온 땅에 임한 어둠은 예레미야가 보았던 죄악이 덮은 세상의 모습이며,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이 말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 꺼져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흑암과 공허와 형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찾으셨고, 하나님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산물이며,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성소 휘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단절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본 로마 백부장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신기할 뿐입니다. 아마 그에게 에수님의 고통과 죽음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분리되는 아들의 아픔으로  보였나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들 속에 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르며 섬기던 자들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여인들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 에수를 따르던 많은 남자들은 없습니다. 그들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붇힌 곳을 확인하고, 슬픔 속에서 어둠으로 사라지는 두명의 마리아 사이에 있습니다. 그냥 그 상황 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들었지만 잊어버렸고,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현장에 있는 것으로 나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당돌히”라고 묘사합니다.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으로서 요셉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8일된 그 어린 예수를 안고 축복했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시므온을 연상시킵니다. 시므온의 찬가는 환영과 감사의 송가였는데, 요셉의 노래는 어떠했을가요? 그의 노래는 탄식과 한숨이었을까요? 그의 노래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깨어져버린 자신의 기도와 꿈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시체는 결코 매장되지 못했습니다. 정치범의 죽음은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관행에 도전하는 요셉은 오늘의 행동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이 예수의 지지자임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나는 애써, 여인들의 틈에서 일어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따라가 봅니다. 그의 얼굴 표정을 살피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 뒤로 물러나와 사람들을 시켜 그 무덤의 입구를 막도록 시키며, 입구를 가리기 위해 욺직이는 돌을 쳐다보는 그를 쳐다봅니다. 마치 영화 <25시> 마지막에 등장하는 안소니 퀸의 미소 같습니다.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무의 침묵이 가득한 날인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시작하려고 하는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가득찬 날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