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우연이나 알 수 없는 진화의 과정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뒤바꾸거나 변덕을 부려서가 아니다. 창조라는 의도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여기 두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온갖 상상을 동원해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어떤 것은 매우 논리적이고, 어떤 것은 매우 공상적이거나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중에서 옳은 게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에 대한 무한 상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나 더 높은 초월적 능력을 믿지 않는 종족이나 집단을 찾아보기가 함들다. 의식 저편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누군가나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다고 느낀다. 또,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고 무덤 너머에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다고 느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3:11).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사람들은 하얗고 긴 수염에 모호한 미소를 짓는 친절한 할아버지로 그린다. 어떤 사람들은 법을 어기면 언제라도 처벌하려고 하는 엄한 경찰관으로 본다.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냉정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는 과거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다고 행각한다. 또 하나님을 모호하고 비인격적인 힘(중력이나 자력과 같은)이라고 믿거나, 그분에 관해 확실히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개념을 거부한다.
어떤 종교는 유일신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수많은 신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우리를 돌본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믿지 않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시간을 초월하며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라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나 동물이나 별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인자하고 사랑스럽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거칠고 심판하길 좋아한다고 본다.
논리적인 세계라면, 이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이들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행히도, 하나님에 관한 대부분의 모색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기(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당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절대로 남기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는 쓰레기를 배출하거나, 전등을 켤 수도 없을 것이다. 아주 작은 흔적 하나라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며, 단서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 강하게 확신할 것이다.
하나님도 이와 비슷하다. 그분이 존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찾아내도록 단서를 남기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알길 원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싶어 하신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낼 때에야 그들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게시하셔야만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흔적 찾기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한 가지는 우리 주변의 세계,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그분의 '발자국'은 어디에나 있다.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라. 무한한 창조자의 위엄과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미경을 통해 물방울을 관찰해 보라. 그러면 가장 작은 부분까지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갓난아기의 손과 발을 보라. 그러면 그분의 세밀한 디자인에 놀랄 것이다. 우리 몸에는 약 1 경개(1조의 만 배)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숫자의 세포가 있으며, 각각의 세포는 개개인의 DNA 가닥을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 식물이 어떻게 자라고, 비가 어떻게 내리며, 동물이 새끼를 어떻게 먹이는지 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와 보살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만 들여다 보더라도, 하나님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창의성,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 사랑하고 따질 수 있는 능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행 14:17)라고 말한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롬 1:20).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분명히 보려면 더 많은 게 필요하다. 바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다.
내가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나에 관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려면 나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분은 정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첫째, 하나님은 한 권의 책,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성경 거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히 1:1)라고 표현한다.
둘째는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인지 발견한다. 성경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9)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썻듯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1:14).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어릴 때 내 어머니는 교회의 교리문답서에 있는 구절을 외우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시다." 그 때 내가 이 말을 완전히 이해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말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에 대한 나의 이해를 넓혀 주셨다. 모두 인정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분은 우리보다 훨씬 크다. 그분은 무한하며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야 그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차를 타고 어떤 산을 향하여 드라이브하는 것과 유사하다. 처음 산이 시야에 들어올 때, 자동차에 있는 우리 눈에는 너무나 작아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록 산은 거대해지고, 우리는 작아진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클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상기시키셨다.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이니" (호 11:9). 그분의 위대함을 알 때만 우리의 작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알리고 싶어 하시는 네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다. 피조 세계의 한 부분도 아니다. 그분은 전혀 다른 영역, 영의 영역에 존재 하신다.
"영"이라는 단어는 안개처럼 공중을 떠 다니는 희뿌연한 어떤 것이나, 공포 영화 속의 무서운 형상이 아니다. 영이란 물질과 반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눅 24:39).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노력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다. 그분에게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이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돌리는 모든 속성을 하나님에게도 돌릴 수 있다. 사람은 느끼고 생각하고 바라고 결정한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 사람은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도 관계를 가지신다. 사람은 행동한다. 하나님도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소망하시며, 결정하시고, 행동하시고, 판단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격체시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인격은 우리의 인격은 전혀 다르다. 그분은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분노, 이기심, 증오, 질투, 교만과 같은 감정이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의 인격은 병들거나 자기파괴적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분만이 완전하시다. 그분의 분노조차도 의롭다. 그분의 분노는 전적으로 악을 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신 32:4)라고 말한다.
셋째,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롭고 깨끗하시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합 1:!3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불완전해서 하나님의 크나큰 완전함과 거룩함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가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깨끗하시며 흠이나 점이 전혀 없으신 분으로 계시하신다. 그래서,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과 자신의 죄악에 압도 된다. 하나님의 거룩을 이해할 때만 우리 죄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지 거룩하시기만 하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운 영이시며, 인격체이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는 네번째 정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여기에서 모든 게 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마다 그 뒤에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창조하시게 했고, 그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게 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추적하며, 우리를 그분에게로 이끈다. 그분의 사랑이 어느 날, 우리를 영원히 그분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은 감성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무시하거나, 심판을 피하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에 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길을 제시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이생에서나 내세에서나 소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Billy Grah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