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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은 완벽이 아니다-이진경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재차 말씀하셨다. “완전하여라.” 그저 완전만이 아니다. ‘하나님처럼’ 그래야 한다는 조건은 가뜩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더욱 더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유한하고 내재적인 인간이, 감히 어떻게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께서 불가능한 명령을 우리에게 내리셨을 리는 없다. 인간으로서 당신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명령하신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존 웨슬리 역시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태는, 어쩌면 ‘완전’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쉽게 ‘완전’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을 완벽(完璧)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완벽이라는 한자어에는 구슬을 뜻하는 璧이 들어있다. 그리고 사전은 이에 걸맞게 완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결함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 결함 없이 완전함, 이것이 우리가 완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흠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완전이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완전을 뜻하는 תָּמִים(타밈)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과 관련하여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그렇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일 완전이 그런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티클 만한 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시도하다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마침내 깨달은 것은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기에 완벽해지는 노력을 포기하고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에서 완전이라는 단어가 왠지 거리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은혜에 대한 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한다.


    만일 예수께서 명령하신 완전이 하나님이 완벽하니 너도 하나님처럼 완벽하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명령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흠이 완벽하게 없을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처럼 완벽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완벽에 대한 강박은 절망과 불행을 낳을 뿐이다. 완벽을 흉내 내려 애쓴다 한들 도달할 지점은 완전이 아니라 결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령하신 완전은 이런 뜻일 리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능한 완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출발은 바로 ‘완전’이라는 단어 자체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완전하라는 명령에 쓰인 헬라어 형용사는 τέλειος(텔레이오스)이며 이 단어의 어원은 ‘마지막’, ‘끝’, ‘목표’ 등을 의미하는 τέλος(텔로스)다. 그러니까 완전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결함이나 흠이 없다는 의미의 방향이 아니라 마지막 목표에 도달한다, 끝까지 간다는 의미의 방향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헬라어의 ‘완전함’은 마침내 도달해야 할 끝까지 기어이 다다랐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완전을 뜻하는 perfect역시 그와 비슷한 의미의 방향을 지닌다. 영어 perfect는 라틴어 perfectus(페르펙투스)를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이때 perfectus는 ‘끝내다’, ‘마치다’, ‘완성하다’라는 뜻의 동사로부터 파생된 단어다.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perfectus는 ‘완전히’, ‘전적으로’ 등을 뜻하는 per-라는 접두어에 ‘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facere라는 동사가 결합된 형태다. 그러므로 영어에서 ‘완전’을 뜻하는 perfect 역시 어떤 임무를 끝까지 수행한 상태, 끝까지 해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기적이나 구원 같은 것을 손쉽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분의 삶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 수 있는 예수님의 생애는 이런 가벼운 생각이 결정적인 오해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쉽게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만나고 섬기고 논쟁하고 싸우시면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나가신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비난과 모욕을 받으면서, 오해와 배신을 겪으면서 마침내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명령하신 맥락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었다.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우리에게 쉽지 않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라고 쉬울 리 없다. 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우리에게 쉽지 않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라고 쉬울 리 없다.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용서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스럽고도 힘겨운 일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 어려운 일을 전력을 다해 해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과 함께 똑같이 사랑하여 그들에게 햇빛을 내려주는 것이 하나님에게 쉬울 리 없지만, 불의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과 함께 똑같이 사랑하여 그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는 것이 하나님에게 쉬울 리 없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힘을 다해 마침내 그 일을 해내신다. 자녀는 부모와 같은 일을 하는 존재다. 부모가 한 일을 똑같이 행할 때에야 마침내 자녀는 명목상의 자녀가 아니라 실재의 자녀가 된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때에야만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한 명령이 아니다. 불가능을 명령해놓고 ‘해봐라, 그게 되나.’라는 하나님의 조롱이 아니다. 하나님처럼 되라는 명령은 하나님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라든가 하나님과 같은 무결점의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력을 다해 끝까지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전력을 다해 행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온 뜻을 다해, 온 힘을 다해 끝까지 해낸 사람들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하나님은 거침없이 인간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_개정개역)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신 18:13)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빌 3:12_공동번역) 완전은 우리가 전력을 다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표다. 하나님이 해내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해내야 할 목표다. 존 웨슬리가 말했던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완전 역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웨슬리 역시 바울처럼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또한 인간의 노력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테니까.


글쓴이: 이진경 교수 (협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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